what the proper at these periods
삶의 여러 부문에의 충격이 코로나 팬데믹의 기간을 통과하면서, 여러모로 하향 이후 회복하고 있는 영역과 여전히 힘든 시기를 지나는 모습들입니다. 과거와 같이 경제 충격의 이후에 경제 분야를 포함하여 여러 영역이 계속 우상향으로 상승 할 것인가 여부에 관심이 지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금번의 변수가 없다면 거시적으로는 여러 분야에 걸쳐 계속 확장 상승해 가는 모습이, 과거에 미루어 적절한 흐름임을 예상해 봅니다.
그간 여전히 가난한 국가의 경우에 여러 발전의 혜택이 점차 전해지면서 삶이 좀 더 나아지고, 기존 발전하고 있는 곳과 선진국은 인구의 증가와 여러 개선의 결과로 이전에 비해 나아진다면, 등락이 있는 가운데, 궁극적으로는 우상향이라는 관점에 부응하다고 보입니다. 이는 과거보다 발전인데, 발전을 어떻게 무엇이 진정한 발전인가에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할 것입니다만, 여하튼 장기적 관점의 경제전체로는 지속적으로 그 부를 증가하게 된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 하게 됩니다.
이는 태양의 빛이 지구에 계속 내려 쪼이듯, 비가 때마다 계속 내리듯, 그 누적 총량은 여전히 증가하지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은 선상이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혹자는 인구가 줄어들면 그 흐름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장할 수 있을 것임에도, 인구가 일시적으로 줄어들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지속적으로 누적 총량은 늘어나지 않겠나 싶습니다. 예외적으로, 운영을 잘못하여 국지적, 전 지구적 재앙이 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 가운데 겨울로 들어서는 대다수 주요국에 있어서 재 봉쇄를 할 것인가, 기존 발병과 사망에 무관하게 경제 회복에 주안점을 둘 것인가의 기로에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생명이 우선인가 경제가 우선인가로 대체적으로 나뉘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도 여러 주장과 변수가 맞물려 논쟁이 있음 가운데, 경제적 삶의 고통도 실제 질병 사망의 고통에 버금간다는 주장을 내세움도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 논의 주장이 가능할 것임에도, 궁극적으로는 생명에 대해 어떤 관점을 보이는가도 중요하다고 보입니다.
평시의 경제 정상시에 일어나는 여러 사고를 대비하면서, 경제 봉쇄보다는 존속을 지지하는 모습이 개인은 물론, 단체, 사회, 국가의 경우에도 그런 모습이 있는데, 생각을 좀 해보면, 한편으로 사망의 주요 연령대의 차이가 있음에도, 생명존중과 함께 무책임한 남녀간의 성행위의 결과를 제어하려는 좋은 취지를 포함하는 낙태 반대의 입장을 유지하는 모습에 모순이 좀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연령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을 것임에도 생명의 소중함으로 볼 때, 경제 활동의 와중에 발생하는 전염병 전파로 인한 사망자 증가 가능성에의 무게를 낮추는 것이 타당한가 싶은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긍정보다는 많은 부정의 변수를 포함한 동성 결혼 지지와 나아가 합법화의 궁극적 여파에 소홀하면서,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보이는 정치 사회 모습에 우려가 됩니다. 좋지 않은 것을 좋다고 포장한 결과에 노출된 중장기적인 많은 피해자들의 증가로 인한 부작용을 소홀히 해서는 곤란하며, 억지로 외면하려 하고 있지 않는지에 의문해 봐야 합니다.
성경의 기록에 집 나가는 탕자를 그 하는바 내버려 둔다고 하심과 어느 고을의 타락상에 그 하는 바를 그냥 놔둔다고 하심 (눅15:12) 등을 예로 들며, 부적절한 해석의 적용을 하고 있지 않는지, 자신이 행할 수 있음을 하지 않음에 대해 무책임과 책임회피의 자기 방어적 포장은 없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것이 나갈 수 없다(막 9:2)고 하심에, 적절한 행동의 부재를 지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능력의 부재와 이 세대에의 심판 아래 놓으심의 한 모습으로 여기며 체념 하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영적인 대결의 경우에는 그와 같이 행해야 할 것임에도, 과실 나무 아래서 과일이 떨어지기만 바램과도 같은 모습을 들어,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하라고 함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의문입니다.
세상 모습과 세상에 거하는 기독교인의 삶에도 모순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싶지만, 평시와는 다른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것을 제때에 행하며, 제어할 수 있는 것을 행하며 안내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인, 리더 등의 책임이며 실천이 적절하다고 보입니다. 주변은 물론 당사자에게도 그런 모습이 궁극적으로 유효하다고 하는 가르침이 더 많지 않는가 싶습니다. 좋은 방향을 찾아 나가게 하는 길잡이의 중요성은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제때 행할 수 있었던 긍정 행동을 행하지 않아 누군가 혜택을 놓치고 피해에 놓인다면, 그에 관한 영향, 책임과 자책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강도 맞은 사람을 외면한 모습과 적극적으로 도와준 사람 (눅10:30)의 예를 통해, 비판 여부를 넘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지 않은 사람의 내면의 불안도 적지 않게 될 것이라고 보입니다. 혹여, 그 고난에 든 사람이 같은 동류를 행하던 불온한 사람일 수 있으며, 지나가던 사람이 매우 급한 일이 있어서 미루고 갔을 가능성도 있을 것임에도, 여하튼 당시에 행할 수 있었던 일을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의 내면에의 양심, 죄의식 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움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방어도 필요합니다. 과오에 대한 비판에의 방어도 어느 정도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며, 잘잘못을 넘어 어떤 비판에 순응하는 성인과 같은 사람은 드물기 때문일 것이며, 물론, 잘못이 없거나 덜한 경우에 어떤 모함에 대하여 방어도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그런 해야 할 방어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리어 오해에 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변론해가는 토론과 논쟁이 세상에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좋지 않은 자세로, 때로는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의 결과에의 영향을 피하려, 관련자를 피하고 모함하며 심지어 공격하기도 한다고 하는 죄의 부작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언가의 도움의 요청과 필요 발견 시, 제때에 적극적으로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유익이 될 것입니다.
절대적 가치에 기댄다면 너무 힘들기에, 대체로 어느 정도는 상대적인 가치에 기대어 방향을 정하려는 이 세대에, 이 정도 이룬 것도 쉬운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만, 경제적 상실의 고통과 생명의 상실의 고통 가운데 어느 방향이 바른 것인가, 환경 오염 발생의 부분을 충분히 잘 제어하여 이룬 산업화인 경우에는, 굳이 이런 갈등에의 노출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눈에 들보가 있는데 타인의 티를 빼려함이 타당하지 않다 (눅6:41) 는 성경 말씀이 있음에도 들보를 빼려는데 도무지 빠지지 않고,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고, 아무리 노력해도 빼기 불가능한 모습이 있기에, 그렇다고, 그 시기까지 기다림이 타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에, 거시적으로는 불가해도 좁은 미시적인 어떤 영역에 맞추어 본다면, 어느 정도 비평이 가능한 입장으로 여김에 이해를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이루기 불가능에 가까운 성경의 가장 고귀한 인물의 삶을 예로 들며 가르침을 전달하는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발견하기는 진정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미루어 볼 때, 더욱 그러함을 경험합니다.
전체 기독인 가운데, 오늘날에도 저 오지에 거주하는 극히 일부의 선교적 삶 등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에 있어서 그런 성경 본문을 들어 비평을 내어 놓을 수 있는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본인도 당연히 그럴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그럴 수 없음을 알며, 그에 합당한 이 세대 자신의 교회 존재 취지에 맞게 성경을 자신의 삶에 맞추어 해석하고 이 세대에 맞추어 변형하는 것이 도리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야 믿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그래서 그런 모습이구나 하며 기독교인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의 바울 사도의 여러 제자도의 훌륭한 삶을 행함에 있음의 와중에 세상 모습의 일반인 소유를 배설물로 여김 (빌3:8) 의 부분과도 같은 성경의 말씀에의 해석을, 그의 세상에 대한 그 생애의 전적인 관점이라고 주장하며 전달함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오히려 핍박 받음과 그 핍박하는 당시 주류의 스스로 높아진 삶의 모습에 대한 분노의 표현을 그런 단어를 사용해 전달한 것임을 가늠해 보게 됩니다.
당시는 물론, 오늘날의 수 많은 산업의 존재는 일에 관련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피조하신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모습에 근간하여, 인생에게 이루게 하신 것으로 여김이 타당한데, 이를 과도히 일반적인 대다수의 삶은 물론, 삶의 유지에 있어서 그렇게 차이가 없을 대다수 기독교인에게도 적용하려고 하는 해석에 대해 의문해 봐야 한다고 여깁니다. 똑 같은 것인데, 교회 내에서 사용하면 좋은 것이고, 세상에서 사용하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라는 주장에는 좀 숙고해 봐야 한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 모습에 있어 일반적인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많은 모습 가운데 일부 모범적인 특정 소수 교회 모습을 예로 든, 성경에의 그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 (행4:32) 를 통해, 과연 이 세대에 그 필요의 부분에 대해 진정성 점검과 그 나눔의 형평성은 과연 타당한가, 어떻게 점검하는가와 실천하는가 등과 같은 부분과 이 세대에 교회의 모습에도 진정으로 실존하지 않은 모습을 들어 적용하려는데 좀 의문입니다.
나아가 당시 공동체의 어느 잘못한 행동에 대해 사도의 과도한 분노는 성령으로부터 인가, 사탄으로부터 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이며, 오늘날에도 본인은 실천하지 않으며 이상적으로만 바램으로 그런 가르침을 전해 나가는 것에 의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과거 당시에 그런 모습의 한 예로, 베드로 사도와 아나니아 삽비라 (행5:3) 모두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이는 이유로는, 성경적으로 서로 용서하며, 죄를 사함 받음과 같이 용서하라고 하심이 (마18:35) 기독교의 진정한 존재가치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수가 있을 수 있으며, 그 실수를 용납하고 나아가 참고 기다리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한가 보며, 올바르게 훈육을 통해 공동선의 결과에 이름이 성경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추정해 보기는 당시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인 삶에 쌓인 어떤 적절히 풀어내지 못한 갈등 분노 내지는, 어쩌면 다수가 그런 유사한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대표격으로 당시 그 부부의 실수에 쏟아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보게 됩니다. 감춘 모습도 이에 근간하여 분노함도 세상에 가까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소유와 나눔에 관련해서는 인류 역사의 여러 모습가운데 여러 실험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잘못된 공동 소유는 게으름을 발생하게 하며, 동기부여를 낮추고, 긍정 도전 실행 의지를 낮추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수준을 낮추게 된다는 여러 주장과 실체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당시 성경의 세대에 합당한 참됨을 오도하려는 것임은 아니며,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화하며 물가 높은 도심에 위치한 적은 평수의 삶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한다면, 부자일 수 있음 등과 같은 여러 모습에, 일률적인 해석과 적용에 주의해야 한다고 보입니다.
좀 얘기가 확대된 모습임에도, 해당 부분은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비방해야 한다기 보다는, 이를 통해 그 모두의 죄가 공존하며, 사도와 그 부부 모두 인간의 결점, 사탄의 개입 등에 각각 휘둘린 잘못으로 공동체가 손상 받는 일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래야 하는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깁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의 가르침의 엄한 시기와 그 후에 십자가에서 잘못을 행하는 인생들의 모습에 용서를 구하심과도 같은 모습의 흐름이 있음을 발견해 보게 됨과 같이, 당시에는 공동체의 기강을 위해 리더급의 과오에 엄한 징계를 행하였음에도, 이후에는 결과적으로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 등 그와 같은 일에 연루된 모든 그 인생의 각 시기에 자신의 실수에 대해 자책이 적지 않았을 것임을 가늠해보게 됩니다.
사도의 그 분노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려 함과 같이 타인의 잘못에도 용서를 해야 함과 같은 선상으로 보이며, 일만 달란트의 죄값을 면죄 받았는데, 자신에게 백 달란트 빚진 자를 성토함(마18:24)과 같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모습과 그러기에 주의해야 한다는 모습의 혼용이 함께하는 가운데, 어느 비평가는 그런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으며 말로만 가르침을 전함이 없는지 진정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비평이 진정 유익이 있겠습니까 싶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일을 하기에, 어느 정도의 소유의 삶을 함께하며 그 일을 해 나간다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세상의 소유 관점과 그렇게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상적인 본문은 줄이고 피하고, 실제 적용 가능한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 진정 타당하지 않은가 보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음에도, 당시 배경적으로 존재했을 일반적인 모습을 추론하여 그 모습의 삶에 대해 전하고, 기독교인의 삶이 이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구경하며, 팬이며, 방관자이던 그런 삶을 기초 삼아, 모든 기독교인이 그렇지 않으며, 다시 말해,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계시록의 칭찬 받는 교회는 극히 드문 모습이며, 좁은 문 가운데서도 최고로 좁은 문이며, 칭찬, 책망과 징계가 혼재한 교회의 모습이 곧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라는 실체와 이를 부인하지 않는 솔직함이 도리어 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회개할 것 없는 천국 백성을 넘어, 회개할 죄인 된 인생의 회개를 기뻐하심(눅15:10)을 말씀하시므로, 타락이 더하여 지는 모습을 어쩌면 환영해야 하는 것인가 좀 혼동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 기쁨이 되는 죄인 된 삶도, 십자가를 지심의 고통 가운데 죄인의 회개로 잠시 고통을 잊으실 수 있으셨음을 가늠하여도, 십자가 고난의 이전과 부활하신 이후와 같이 좀더 적절한 시기에 회개에 이르기를 바래봅니다. 회개한 죄인에 죄사함과 천국을 약속하심에도, 다른 시기와 같이 그 기쁨을 드러내실 수 있으실까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러 선진국의 타락이 더해짐과 새로운 선교지의 영역으로 회귀하려는 모습의 진의를 일부 알듯합니다. 역설적이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선진국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여전히 블루오션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타락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잘하고 있는 영역이 있음에도, 이를 가리게 되는 양상을 보임에 주의를 요한다고 보입니다. 피하고 싶지만 요나가 가야 할 이 세대의 그런 곳이 되어 가고 있다고 보입니다.
선과 악이 혼재하는 각 인생에 선이 더 많이 존재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죄에 대해 단호할 것을 전하심과 죄를 끊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죄를 끊지 못해 지옥에 들어가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음과 같이, 잃어버린 양을 찾음의 불안과 찾음의 기쁨의 모습, 어린 아이와 같은 소자를 영접하고 올바르게 인도하여 연자 맷돌을 지고 바다에 빠지는 징계를 받지 않는 삶의 가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계속 용서해 주라 하심의 가치 등 (마18장) 종합적이며 포괄적인 말씀인 구절 모두는 서로 다른 가치와 방향을 전함과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상전이라는 어느 이론의 관점으로, 물이 끓는점, 어는점의 그 구분이 사실 각각의 배경에 축적이 포화, 한계점에 이름의 급작스런 변화같이 보여도, 이는 이전의 부단한 각각의 축적의 결과라는데 있다고 합니다.
얼음이 물의 액체와 전혀 다름이 아닌 것이 아니며, 물의 끓음이 끓지 않은 이전 액체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닌 것이 아니듯, 이는 선과 악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닌 것과도 통한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방향성과 에너지를 낮추면 그 이전으로 돌아감과 같이, 빛과 어둠이 전혀 다름이 아니듯, 해가 뜨고 짐으로 밝음과 어둠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듯, 다만 그 쌓임과 축적의 한계점에 이르러 잠시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 상태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습들과 각 인생의 모습은 결국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며, 단지 진정한 다름으로 구별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보내신 성령으로 태어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 모든 것에 대해 진정한 평가를 내실 수 있음을 가늠해 보게 하십니다.
글 가운데 진실과 역설의 유머가 혼재함에 양해를 바라며, 좋은 모습의 경우에 아는 것을 넘는 실천이 언제나 유익으로 이어짐을 바램으로 적어봅니다.
성경의 말씀이 진리이기에, 그렇다면 이 세대는 성경 역사의 어디를 향해, 어느 구간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우리는 진정 어떤 곳을 이루며 어느 곳에 살고 싶은 것인지 이 시기에 자문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Oct 2020